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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여는 문

04 창조시대2: 타락, 심판, 은혜, 약속 (창세기 3장)

왜 만족하지 못할까?


가끔 방송을 통해서 요즘 경제가 너무 힘들다는 말을 듣곤 한다. 가계도 기업도 정부도 모두 다 힘들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무엇이 힘들다는 것일까? 전쟁을 겪은 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보다 더 힘들까? 아무 것도 없이 다시 시작해야하는 상황에 비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일까?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을 예전에는 아주 귀하게 여길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산업화와 기술의 발달로 그런 것들을 누리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는 전화기나 자동차 한 대만 있어도 잘 산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현재는 그런 것들을 모두 가져도 잘 산다고 생각 하지 않는다. 어느 디자이너가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전 세계의 90% 사람들은 하루에 만 원 이하의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그 중에 80%의 사람들은 이천 원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전 세계의 10%의 사람들은 하루에 만 원 이상의 돈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전 세계에서 99%는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며 나머지 1%는 대학교육을 받았거나 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KBS 오늘, 미래를 만나다’, 배상민 교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1%와 10%에 속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욱 힘들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쩌면 0.1%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닐까? 결국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0.1%에 속해 있다 해도 0.01%가 되지 못해서 힘들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로 지어졌다. 또 다른 무엇인가를 얻어야만 하는 세상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들로 충분한 세상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완벽한 세상에서 무엇이 부족해서 죄를 지었을까?

 

왜 그 나무를 만드셨지?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를 사람에게서 찾으려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찾고자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만들지 않았다면 이러한 끔찍한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또는 이렇게도 말한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먹을 것을 미리 아셨을 텐데 왜 그 나무를 만드셨지? 하나님은 나쁜 분이야.’

 

그러나 이러한 오해들은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다음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어느 날 동네에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개인 소유의 빙상경기장이 세워졌다. 그곳의 주인은 마음씨가 너무 좋았다. 경기장이 있는 동네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 년 동안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티켓을 주었다. 또한 3개월 간의 강습과 모든 안전 장비들을 무료로 제공하면서까지 그곳을 이용하게 했다. 사람들은 너무 너무 행복해했다. “우리 동네에 이런 마음씨 좋은 사람이 있다니”라고 서로 말하면서 그 주인을 칭찬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한 방향으로만 타야하는 빙상 경기장의 안전규칙을 어기고 답답하다고 헬멧도 벗은 채 반대 방향으로 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가운데 큰 사고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인하여 뒤엉켜버린 경기장 여기저기에서 고통의 신음 소리들이 들려왔다. 몸을 추스른 사람들은 일어나 다친 사람들을 살피는가 싶더니 자신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주인을 찾아갔다. 그리고 주인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우리 동네에 이런 경기장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요. 그러니 책임지시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우리에게 이런 무료 티켓을 주지 않았더라면 사고도 없었을 것이요.”

 

잘못한 것 없이 좋은 일을 한 마음씨 좋은 주인에게 사람들이 이렇게 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것은 착한 주인의 문제가 아니라 안전규칙을 어긴 그 사람의 문제이며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위의 이야기처럼 그것이 옳지 않음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지 않으셨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세상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제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지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셨는지를 다음의 글들을 읽으면서 알아보자.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주신 명령이 있다. 기억하고 있는가? 그것은 ‘~하라’와 ‘~하지 마라’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그 중에 두 번째로 주신 명령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명령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안전할 수 있도록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고 안전한 길임을 두 가지 명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어느 날 동산을 거닐던 여자에게 뱀이 이렇게 말한다.

 

…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1)

 

여기서 뱀의 질문을 생각해보자. 뱀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정말로~’라는 말을 통해서 뱀도 하나님의 명령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뱀의 목적은 무엇인가?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먹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만약 여자에게 ‘하나님이 정말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라고
처음부터 질문했다면 여자와의 대화는 거기에서 멈췄을 것이다.

 

‘응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어.’

 

뱀의 질문에 여자가 대답한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2-3)

 

우리는 여자의 대답에서 아무런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자의 대답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가졌다. 그것을 발견했는가? 창세기 2장의 내용을 기억한다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의 대답 가운데 첫 번째 문제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대답이다. 2장을 보면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그 중에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6-17)

 

그런데 여자는 분명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런 것이 또 있다. 하나님이 언제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는가? 먹지 말라고 하셨다. 만지지도 말라고 하신 적은 없으시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정보였다. 여자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시는 것을 먹으면 죽는다고 뱀에게 대답했다. 하나님은 ‘죽을까’가 아니라 ‘반드시 죽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말이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3)

 

뱀은 대화 속에서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4)

 

또한 분명하지 않은 여자에게 뱀은 거짓된 정보를 더욱 분명하게 전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5)

 

여자는 더 이상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안전규칙’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오히려 뱀이 전해 준 정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착각했다. 그리고 아주 기분 좋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여기서 한 가지 더 심각한 문제는 죄를 범한 여자를 보면서 아담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가 준 열매를 받아먹었다는 데에 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반드시 죽는다’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분 좋게 오는 자신의 아내를 보았기 때문인가? 오히려 뱀이 말한 것이 정확한 정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주는 것을 받아먹지는 않았을까? 이유야 어떻든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행동이 완벽한 세상에서 죄가 들어오게 한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마귀가 또?

 

신약 성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마귀와 예수님의 대화가 나온다. 여자는 완벽한 세상에 있었으면서도 뱀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했지만 예수님은 최악의 조건 속에 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다. 이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말씀 밖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통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인 것을 인정받은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한 후 아주 지쳐있으셨다. 마귀는 최악의 상태에 있는 예수님에게 찾아왔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4:3)

 

마귀가 예수님께 한 말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에덴동산에서 여자에게 분명하게 물어보던 마귀가 여기에서는 불분명하다. 그 사이 마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예수님께서 마귀의 말을 듣고 돌을 떡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인다면 어떤 문제가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오신 예수님께서 마귀의 말을 듣고 행동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또한 예수님께서 마귀의 질문에 침묵하신 다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간교한 마귀의 시험에 예수님은 마귀가 의도하지 않은 대답을 하셨다.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4)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하게 대답하시는 예수님에게 마귀는 또 묻는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5-6)

 

마귀는 예수님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시험을 물리치자 교묘히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다시 접근한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아들 임을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아주 집요하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 91:11-12)

 

이번에도 예수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7)

 

마귀는 마지막으로 다시 접근한다. 그 말은 더욱 그럴듯해 보인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사람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성령을 사람들에게 보내 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마귀는 고생할 필요 없이 아주 편한 방법으로 그것을 얻으라고 유혹한다. 마귀는 더 이상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렇게 해보라는 것이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8-9)

 

예수님은 마귀의 말을 듣고 고민하지 않으셨다. 바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0)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완벽하게 물리치셨다. 우리가 마귀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가지지 않고서는 절대 이길 수 없음을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알려준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엡 6:11-17, 새번역)

 

죄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말씀에서 떠나므로 시작된다. 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서 법으로 규정해 놓은 것들을 어기는 것인가?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을 행해야 할 사람이 마귀의 말을 듣고 선이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죄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리 선한 행동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믿음을 따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

 

…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롬 14:23)

 

수치심


죄가 들어온 후에도 세상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맑던 하늘이 갑자기 구름에 싸여 어두침침해지거나 번개가 치면서 깜짝 놀라게 되는 자연 현상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에게 없던 감정이 생겨났다. 그것은 수치심이다. 여자가 준 그 열매를 아담이 먹자마자 그들의 눈이 밝아짐을 알았다.

 

어떤 중요한 깨달음을 경험할 때의 밝아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벗었음을 아는 인식이었다. 죄를 지은 후 ‘벌거벗음’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보고는 수치심을 느꼈다. 또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벗은 몸을 가려보았지만 마음으로 느껴진 수치심은 결코 가릴 수가 없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2:25)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 3:7)

 

두려움


죄가 들어온 후 반갑지 않은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두려움이었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본문을 보면서 생각해보자.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8)


사람은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기쁨의 장소에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죄가 들어오기 전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는 그들에게 아주 친밀하며 따스한 음성으로 들려졌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그들에게 동일한 하나님의 음성은 더 이상 부드러운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친근한 하나님이 두려운 하나님으로 느껴졌다. 하나님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셨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그분은 여전히 동일한 분이시다. 바뀐 것은 사람이었다. 결국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므로 그분과 소통이 불가능해진 사람에게 찾아온 죄의 결과 중 하나였다.

 

죽음


수치심과 두려움은 죄가 들어온 후 사람이 느끼게 된 감정이었다. 그러나 죄는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죄의 가장 끔직한 결과인 죽음이 사람에게 찾아오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을 보면 사람은 죽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우리의 겉모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 ‘형상이란 원어의 의미로 ’그림자‘, ’이미지(image)’, ‘상(像)’을 말하며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사랑, 진리, 생명, 의, 인격 등)을 반영하고 있음을 가리킨다.(프리셉트 성경)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속성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다른 피조물과 달리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이 육체 가운데 거하게 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여기서 생기란 하나님의 영을 의미한다. 육체로만 존재하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함께함으로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과 영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됨으로 죽음이 찾아왔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그러나 성경을 읽다보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은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육체의 죽음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도록 만든다. 사람이 육체로만 있지 아니하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존재가 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그분의 영이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육체로만 남아 있는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저주를 받아 죽음 가운데 두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게 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약속하신 하나님의 영 곧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4)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아래의 방법 외에는 없다고 소개하고 있다.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 2:38)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만약 우리가 이러한 절차를 밟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들어왔다면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예배당 안에서 행해지는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각자의 죄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어디 있니?

 

죄로 인하여 수치와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지라 (창 3:8)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담에게는 어떤 소리로 들렸을까? ‘너 지금 어디 있어? 내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그랬어!!’라는 소리로 들렸을까? 숨어있는 아담에게는 무섭게 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투로 말씀하셨을까? 한 참 후의 일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도망갔던 요나 선지자도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욘 4:2, 새번역)


하나님은 분명 아담의 상태를 안타깝게 바라보시며 온전한 사랑으로 그를 찾아오셨다.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부모들이 ‘너 왜 그랬어?’라고 속상해서 말하기도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달리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신 모습으로 아담에게도 요나와 같이 동일하게 다가오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끝나기 전까지 아담은 그런 생각 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있나?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또한 그가 어디에 있는 지도 알고 계셨다. 두려워서 떨고 있는 그에게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해서 그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난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완전히 치료하기 위해서 그를 부르셨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 30:26)

 

그러나 아담은 그것을 몰랐다. 그는 오히려 핑계를 대며 둘러댔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2)

 

그런데 그 핑계가 조금 심각하다. 단순히 여자에게만 책임을 지우려 하지 않는 것 같다. 하나님이 주셔서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신 여자 때문이라고 한다. 여자가 주었지만 하나님이 그 여자를 자신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둘러댄다. 이 장의 서두에서 빙상 경기장 주인에게 사람들이 한 행동들을 기억하는가?

 

흔히 우리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의 시작은 아담이었던 것이다.

 

핑계 대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핑계대지 마라고 호통을 치지 않으셨다. 그에게 하셨던 말씀을 하와에게로 이어가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  (창 3:13)

 

아마도 아담 옆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여자는 순간 ‘내가 줄 때는 잘 먹더니만’하면서 그를 째려 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계속 품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하나님은 아담의 대답을 들으신 후 한참 동안 생각하지 않으시고 여자에게 바로 이어서 질문하신다. 아담과의 짧은 대화를 듣고서 그래도 양심이 있었는지 여자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뱀’이라는 표현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고 교묘하게 뱀에게 핑계를 댄다.

 

…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3)

 

이러한 핑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교묘하게 스며들어 있지 않은가? 자신의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하고 주변 상황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들이 구석에 몰릴 때 마다 나타난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트리는 것을 매번 경험해오지 않았는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핑계는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없음을 증명하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요일 1:10, 새번역)

 

심판


핑계 대는 여자의 차례가 끝났다. 이제는 뱀의 차례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는 질문을 뱀에게는 하지 않으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창 3:14)

 

오히려 ‘너는 어쩌다가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로 말씀을 이어가신다. 하나님은 뱀이 모든 가축과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서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정도로는 뱀이 유혹한 것에 비하면 너무 형벌이 약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자동차 사고에서만 보더라도 자신이 직접 사고를 내지 않았어도 어떠한 경우에는 원인 제공자가 상당한 부분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하는데 뱀의 형벌은 죄에 비해 너무도 가벼워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짐승인 뱀에 대한 형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뱀에게 들어와 도구로 삼은 원인 제공자 마귀에게 다음의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하나님은 진짜 원인 제공자인 마귀의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이 머리를 상하게 하는 심판을 말씀하신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저주를 당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평강의 하나님이신 그분은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롬  16:20)

 

여자에게 내려진 징계

 

뱀에 대한 심판이 끝났다. 뱀의 심판의 내용을 듣고 있었던 아담과 여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들에게 질문만 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을까? 아니면 더 큰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까? 하나님은 물어본 순서가 아닌 그 열매를 먹은 순서대로 각자에게 말씀하셨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6)

 

여자에게 죽음에 대한 심판 외에 임신하는 고통과 남편의 다스림을 받을 것이라는 징계가 내려졌다. 여자에게 내려진 징계를 보면서 죄가 들어 오기 이전에도 해산의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고통이었다.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처럼 그 고통은 축복이었고 감사였으며 죄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

 

그런데 여자는 그 고통이 무엇인지 모른다. 해산의 고통을 얻기 전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범죄 이후 여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고통이 아닌 한 죄인을 낳았다는 두려움의 고통을 첫 번째로 경험한다.

 

여자에게 내려진 또 다른 징계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가?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존재했다. 서로를 돕고 섬기는 귀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이 구조가 깨져 버렸다. 더 이상 동등하지 않고 여자가 남편 아래에서 다스림을 받아야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이 구조는 죄로 인하여 나타난 결과이지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부부는 이 구조 아래에 갇히게 되지만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그분이 원래 계획한 구조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각각 자기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중하십시오. (엡 5:33, 새번역)

 

남자에게 내려진 징계


다음은 남자의 차례가 되었다. ‘어떤 징계가 주어질까?’라고 설레 이는 마음으로 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귀를 닫고 피하고 싶은 차례였다. 어쩌면 여자에게 내려진 징계가 끝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에게 땅의 저주와 노동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 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17-19)


어떻게 보면 남자에게 내려진 징계가 여자보다 덜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주 받은 땅으로부터 수고해서 얻은 소산으로 가정을 섬겨야하는 막중한 책임은 여자에게 내려진 징계의 내용과 다를 것이 없음을 보게 된다.

 

아담이 왜 그렇게 반응했을까?

 

아담과 여자에게 내려진 징계의 말씀을 들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행복 끝 고생 시작!’이라는 구호를 마음속으로 외쳤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담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아내를 불러서 이름을 지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 3:20)


아담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충격으로 엉뚱한 행동을 한 것일까? 하와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아담을 부르셨다. 뱀에게 하신 말씀을 들을 때에만 하더라도 그 두려움은 여전히 그대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아담은 그것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고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렘 29:11)

 

아담은 하나님께서 마귀를 심판하시고 사람을 살린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사람을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그들에게 후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심판을 받는 자들이 더 많아질 뿐이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징계를 심판으로 보지 않았다.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알게 된 아담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아내인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보! 우린 이제 살았어!’

 

여자의 이름을 ‘하와(생명)’라고 한 것은 당연한 그의 반응이었다.

 

가죽 옷


두려움이 변하여 다시 기쁨을 얻게 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심으로 은혜로운 약속을 나타내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 3:21)

 

아담과 하와는 육신의 수치를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입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의 수치까지도 가릴 수 있는 옷을 직접 지어 입혀주셨다. 이것은 앞으로 오실 여자의 후손의 옷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주심으로 입게 되는 옷이다. 그분을 믿는 모든 자가 입게 될 거룩한 옷을 통하여 죄로 드러난 수치가 영원히 가려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모두가 경험하길 기도한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29)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7)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왜 지으신 거지?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의문을 가진다. 죄가 들어와 세상이 심판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으신 이유가 무엇일까? 아래의 말씀을 읽어 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엡 1:3-6, 새번역)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불순종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책임을 대신하시기로 창세전에 계획하셨다. 사람이 저주를 받아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 자신이 저주 받아 죽을 것을 계획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불순종한 아담의 행동으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십자가에서 순종하신 예수님의 행동으로 회복되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9)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셨으면 창조자가 피조물을 위해 모든 것을 책임지려는 계획을 하시는가? 책임지지 않으셔도 누가 뭐라 말 할 수 없는데 신이 인간을 위해 저주받아 죽는 이 상황까지도 계획하신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원망은 당연히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으로 바꾸어야 만하는 것이 아닌가?

 

생명나무의 길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은 기쁨의 동산인 에덴에서 그들을 내보내야만했다. 이것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죄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새 옷을 입고 나간 자녀가 친구들과 놀면서 흙과 오물들로 더렵혀진 상태로 돌아왔을 때 그것을 알게 된 부모가 자녀를 방안으로 바로 들여보내지 않는다. 입구에서 옷을 벗기고 욕실에서 목욕을 하게 한 뒤 새 옷을 내어주어 입힌 후에야 방으로 들여보낸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들이 더러워진 상태로 에덴동산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죄로 더러워진 사람을 목욕시키고 새 옷으로 다시 입혀주시기 위해 잠시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 보내야 만 했다.

 

바로 그 목욕탕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은 그 탕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므로 깨끗해 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시는 새 옷을 입을 때 다시 원래 있던 방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다른 목욕탕은 안 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욕탕 이외에 다른 목욕탕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생명나무의 길로 오는 유일한 방법을 오직 예 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하셨다. 그 외의 방법은 불법이며 내어 쫓음을 당하게 된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 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행 4:12, 새번역)

 

창세기 3장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짧은 장 안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면 이후에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더욱 놀랍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계속해서 알아가기를 바란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0)

 

※ 다음 글은 아래의  책을 구입하셔서 읽으시면 됩니다.

(출판사의 판권 계약으로 인하여 '성경을 여는 문'의 전체 내용을 올릴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여는 문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는 삶의 비밀! 제자로 사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적 지침서 종교개혁을 통해 성경이 성도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지금은 또 하나의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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