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오랫 동안 사역을 해오면서 항상 떠나지 않는 고민이 있다. 그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과는 다른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는 하지만 성경은 모른 채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방법이 아닌 자신들의 열심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다 보니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또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분명히 다른데도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며 따르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받던 어느 목사님의 자녀는 오늘날의 교회가 심리학과 마케팅 그리고 엔터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부족하게 된 기독교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다시 기독교를 세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또 한 사람의 글을 읽어보자.
“교회”에-모인 제자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돈, 더 많은 건물이나 프로그램, 더 많은 교육, 더 많은 위신이 아니라는 말에 충격을 받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의 모임, 곧 교회는 언제나 그런 것들이 하나도 없거나 거의 없을 때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다.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에 필요한 것은 그분이 제자들의 삶 속에 실현하시는 차원의 삶이 전부다. (‘잊혀진 제자도’, 달라스 윌라드, 복있는 사람)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위의 글처럼 더 많은 사람, 더 많 은 돈, 더 많은 건물이나 프로그램, 더 많은 교육, 더 많은 위신인가? 더 많은 것들이 더해진 현재 기독교에서는 성경에서 제시하는 교회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무엇인가? 아래의 말씀을 읽어보자.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 15:7-12, 새번역)
위의 말씀을 요약하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은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 안에 거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할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제자의 삶이 아닌 것 같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은 서로에게 너무 부담스러운 주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을 피할 다른 단어를 찾아냈다. 그 단어는 새로운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겉으로 보기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엇이 믿음이다’라고 하는 데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 말하지 않고 각자가 체험 해 온 것들을 믿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는 체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일 수 없다.
나타난 현상이 다 진리일까?
어느 한 목사님께서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 안에 문제가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한 성도님이 성경에 없는 자신의 체험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불거진 문제였다. 목사님은 그 분을 조용히 불러 권면하려 하셨다. 그런데 그 분은 목사님의 권면보다 자신이 직접 본 것을 나누려 했다.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 그 분에게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타난 현상이라고 다 진리입니까?’
그렇다. 나타난 현상만을 보고 우리가 믿는다면 얼마나 많은 오류에 빠지겠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종말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렇게 믿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때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 가장 먼저 그리고 반복해서 강조하신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자신을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마 24:4-5)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들을 미혹하겠는가? 마귀가 하와를 미혹할 때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으로 미혹하지 않겠는가?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고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감탄사를 연발하도록 하지 않겠는가? 즉 나타난 현상에만 집중한다면 그것이 비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진리인 줄 알고 따라가지 않겠는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마 24:24)
위의 말씀처럼 많은 성도들이 쉽게 미혹 받는 것을 보게 된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보다 눈으로 보이는 표징과 기적들에 대해 더 크게 반응하고 있는 무지한 모습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경험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체험하는 것이 더 큰 믿음이라고 받아들이는 이상한 신앙생활의 모습이 많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또한 어떤 이들은 그런 체험과 나타난 현상들을 강조하며 성도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기도 한다.
이런 위험한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은 후 자신이 경험한 대로 신앙생활을 유지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은 보암직하고 먹음직해 보이는데 맛이 없는 기독교가 되어 버렸고 제자의 삶보다는 믿음이라는 단어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 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 하지만 어떻게 말씀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무작정 말씀을 읽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말씀들을 들어왔고 읽어왔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읽어도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면 본문의 의미보다는 각각의 감정 상태에 따라 편리한 대로 해석하며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상황에 또 다시 이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시도해왔던 다양한 신앙생활의 방법들을 내려놓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무슨 말일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 다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험해 왔듯이 읽어야만 하는 부담감으로 읽어오지 않았는가? 한 해를 시작할 때 ‘올해는 꼭 일독을 해야지!’라는 다짐으로 성경읽기를 시작한다. 지금까지 설교를 들어서 어느 정도 익숙한 이야기가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의미를 모르는 어려운 이야기로 다가 온다. 마치 한글을 갓 뗀 아이가 뜻도 모른 채 수능 지문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진다.
성경 읽기에 있어서 어려운 점은 읽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어려운 단어들, 생소한 인물들과 지명들, 읽다 보면 여기서 나온 사람이 저기서 또 등장하는데 그 사람은 누구인지? 하지만 가장 어려운 부분은 그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른다는 데 있다. 의미도 모른 채 계속해서 읽어 내려가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은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과 함께 읽지 못하고 읽지 않는다는 죄책감을 동시에 느낀다. 신앙생활의 연수가 더해 질수록 성경읽기는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성경보다는 간증집들이 은혜가 되고 그 가운데 성경적이지도 않은 경험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며 본받고자 한다. 언제든지 펴서 읽을 수 있는 성경이지만 주일에만 펴서 아주 짧은 부분을 눈으로 읽는 정도로 성경은 그렇게 취급받는다. 오직 사역자들이 설명해 주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언제부턴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마치 성경에 나와 있는 것처럼 말하는 뻔뻔스러움도 가지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성경을 모르는 데에 있었다. 그런 성도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간으로 보면 이미 교사가 되어 다른 사람을 가르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이다.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물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젖을 먹고서 사는 이는 아직 어린아이이므로,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히 5:12-14, 새번역)
어떻게 읽어야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 예배 시간에만 성경을 본다. 또한 공동체 모임 속에서 성경을 펴서 읽어야 될 때만 읽는다. 그러다 보니 각 본문들이 연결되지 않아 성경을 더욱 어렵게 대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어떤 모임 때에만 성경을 읽는다면 신앙 년 수가 아무리 오래되었다할지라도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분적으로 읽는 연습을 그치고 어떤 흐름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지를 배워야한다. 왜냐하면 책을 읽을 때 자신이 감동 되는 부분만 읽고 참고하려한다면 저자가 그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읽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하는 원래의 의미는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느낌을 가지고 은혜를 받았다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아래의 말씀을 읽어보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중 하나를 꼽는다면 아마도 위의 말씀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위의 말씀을 좋아하는가?
혹시 우리가 계획한 일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위로가 되기 때문은 아닌가? 시험을 치러야 하는 학생들이 시험지 앞에서 위의 말씀을 떠올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어쩌면 우리들은 자신의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면서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바로 위아래의 구절만 읽어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 4:12-14)
위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바울은 감옥에서 이 편지를 기록했다. 복음을 위해 고난 받고 있을 때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쓸 것을 보냈던 일들을 언급한다. 그렇게 한 이유는 궁핍한 상황에 처한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 안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하면서 자신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칭찬하기 위해서였다. 즉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다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는 바울의 신앙고백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 앞에 장애물이 놓여 있을 때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위해서 이용하곤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상황들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을 때 부분만이 아닌 전체로 접근해야만 한다.
목적이 뭘까?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자하는 책인가? 마치 이솝우화와 같이 여러 가지 교훈들을 말하는 책인가? 아래의 말씀을 소리 내어 읽어보자.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딤후 3:15-17, 새번역)
위의 말씀은 성경의 목적을 두 가지로 알려준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각각의 목적을 가지고 접근 할지라도 성경이 사람들에게 원하는 목적은 이것 밖에 없다. 왜 성경을 읽으려하는가? 요즘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어떤 도움이 될 만한 글귀를 찾고 있는가? 자녀를 잘 키우고자하는 데 어떤 방법이 좋을까 궁금해서인가? 아니면 믿고 있는 사상을 뒷받침 해줄 근거가 필요해서 성경을 읽으려하는가? 만약 우리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목적으로 성경을 읽고 배우려한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참고서적 정도로 머무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성경의 두 가지 목적을 따라서 풀어가려고 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주제가 뭐지?
그런데 창세기부터 읽다보면 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아야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명확하게 전달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구약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보다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교훈을 얻는 정도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주제와 시대로 나누어 본 성경의 흐름]
(구약) 예수님이 오실 것이다
창조시대 ⇨ 족장시대 ⇨ 출애굽과 광야 시대 ⇨ 정복시대 ⇨ 사사시대 ⇨ 단일왕국시대 ⇨ 분열왕국시대 ⇨ 포로시대 ⇨ 포로귀환시대 ⇨ 침묵시대
(신약) 약속하신 예수님이 오셨고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 ⇨ 성령시대
※ ‘예수’의 뜻 :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
성경은 약 1,600년의 기간 동안 40여명의 저자들이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썼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한 권으로 묶어서 보면 서로 다른 시대의 저자들이 기록했는데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그 이야기를 읽는 모든 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통해 구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복음을 말하거나 전하는 자가 있다면 아래의 경고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에도 말하였지만, 이제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갈 1:8-9, 새번역)
History? His Story?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마치 그리스신화와 같이 생각하기도 한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신화의 내용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신화가 아니다. 없는 이야기를 상상해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역사이다. 단순히 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 진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통하여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
원래 역사라는 단어 ‘History’는 고대 그리스어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탐구하여 알아낸 지식’을 의미한다. 오늘 날에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조금 억지스러운 접근이기는 하지만 ‘History’는 ‘His Story(그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통일 되어 사용하는 역사 연대 표기법을 보면 ‘B.C.’와 ‘A.D.’로 구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질문을 하고자 한다. ‘B.C.’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바로 대답이 나올 것이다. ‘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A.D.’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After D?’ 그러나 ‘A.D.’는 라틴어로 ‘Anno Domini(아노 도미니)’를 말한다. ‘우리 주님의 해’라는 뜻이다.
이런 역사 연대 표기법이 어떤 이들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으나 세계의 역사 연대를 예수님을 중심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우리는 그분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고 역사가 B.C.와 A.D.로 나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나눌 수 있다. 이 땅이 주는 소망만을 바라보는 공허한 우리의 인생이 그분을 만남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 된다.
이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참 평안과 기쁨을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새로운 삶에 대한 평안과 기쁨보다 이 세상에서 경험했던 일시적 만족을 더 그리워하게 된다.
광야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보다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이 더욱 그리워지게 되다보니 그 땅에서 먹었던 음식을 먹고 싶은데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시간에 속해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의 시간을 자신의 시간표에 짜 맞추려한다.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우리가 그 분의 시간 안에 들어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맞춰졌던 인생의 초점이 예수님에게로 맞추어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예수님보다 다른 것에 눈을 돌린다. 오직 예수님은 우리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말이다. 그 다른 것들은 바로 아래와 같다.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서 원하는 것을 얻는가?’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열심히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며 전도도 한다. 때로는 어떤 이들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것들을 주셨어요.’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러움을 가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사람들처럼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죄책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시간 안에 있으면서 자신의 시간으로 예수님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교회의 역사 가운데 계속 있어왔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우는 것은 우리의 시간 속에 예수님을 끌어드리려는 시도를 멈추게 한다. 또한 우리의 시간을 예수님의 시간 속에 맞출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만약 우리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성경을 배운다면 예수님만을 통해 구원으로 인도함을 받고 어떻게 그분의 시간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누굴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복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 복은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인가?
아래의 말씀을 읽어보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1-3)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각자 마다 여러 부분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복 있는 사람을 두 부분으로 분류해 보면 ‘~하지 아니 하는 사람’과 ‘~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부모님이 자녀에게 ‘~을 하지 않고 ~하는 아이가 예쁜 아이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 하지 아니하는 사람]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는 사람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는 사람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
[~ 하는 사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
그런데 왜 복 있는 사람을 ‘~을 하지 아니하고 ~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을까? 그냥 ‘복 있는 사람은 ~하는 사람이다.’라고 해도 되었을 텐데 왜 그렇게 표현한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제일 먼저 사람에게 주신 것이 다름 아닌 ‘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 (창 1:27-28)
사람은 원래 복 있는 존재였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자체가 복 덩어리였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며 첫 번째 명령을 하셨다. 그것은 ‘~ 하라’였다.
…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셔서 살게 하셨다. 그런 다음 사람에게 두 번째 명령을 하셨다. 그것은 ‘~ 하지 마라’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6-17)
두 가지 명령을 보면서 우리는 시편 1편의 말씀처럼 창세기 1장의 말씀도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라’와 ‘~하지 마라’이다. 그런데 창세기 1장의 순서와 시편 1편에 나오는 순서가 다르다. 왜 그런 것인가? 그것은 사람이 타락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복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는 사람을 더 이상 복(福) 있는 상태로 두지 않았다. 오히려 화(禍)가 있는 상태로 바꾸어 놓았다. 그런 사람이 다시 복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사람은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은 복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원래 복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시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고 그 상태에서 돌이켜야한다고 시편 1편은 말하고 있다. 즉 ‘~ 아니하는 사람’, ‘회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회개하는 사람은 악의 상태에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회개한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가장 가치 있음을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주는 즐거움이 비교할 수 없이 커서 그 즐거움을 따라 그 나라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며 사는 삶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3)
우리는 위의 말씀을 읽으면서 저절로 눈이 크게 떠질 것이다. 왜냐하면 복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는 말을 집 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형통에 관해서는 아주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성공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들이 각 분야마다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형통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에 대한 답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회개와 말씀을 따라 사는 삶’ 이 두 가지 외에는 없다.
만약 형통이라는 단어를 세상에서 말하는 단어로 이해하게 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될 수 있다.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형통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말하는 형통은 어떤 것일까? 각자의 뜻대로 되는 것일까? 여기에서 성경에 나오는 한 사람을 관찰해보면서 그 뜻을 알아가 보자.
형통한 사람은 누굴까?
성경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오랜 동안 해왔던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이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편애와 형제들의 질투로 인하여 노예로 살다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해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꿈대로 되는 인물로 흔히들 알고 있다. 그래서 우
리는 이렇게 구호를 외친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자!’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지고 어떤 고난도 이겨내자!’
‘하나님은 꿈을 이루실 것이다.’
이후에 요셉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히 나누어보기로 하고 지금은 그가 겪은 고난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한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은 후에 그가 겪은 일들은 고난이었다. 형제들의 질투로 인하여 노예로 팔려가게 되고 억울한 누명을 안고 옥살이를 하며 괴롭고 외롭게 살아갔다. 꿈과 현실은 달랐다.
그런 요셉을 형통한 사람으로 볼 수 있는가? 노예로 팔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는 것이 형통인가? 물론 이후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기 때문에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의도적으로 그가 총리가 되었을 때를 형통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가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을 때를 형통이라고 말하고 있다.
노예로 팔려 갔을 때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1-3)
억울한 누명으로 옥살이를 했을 때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 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 39:20-23)
우리의 상식으로 형통과는 상반된 상황에 처한 요셉에게 다 잘 되게 해 주셨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보이는 상황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표현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상황만을 보지 않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형통이라는 단어를 떠 올릴 수 있다.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요셉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는 형통의 핵심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이다. 노예로 끌려갔을 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을 때도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셨다. 주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알았기에 그가 노예의 삶을 살아도 죄수의 삶을 살아도 있는 곳에서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요셉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형통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바라보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불행하고 억울한 자 같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 안에서 보게 되는 형통은 사람들이 눈으로 보는 현실의 편안한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죄인의 길에 서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리를 떠나는 회개를 경험한 사람이 오직 그 분의 말씀 안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언제든지 그 분의 말씀과 함께 하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이며 형통한 삶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성경은 우리를 회개의 문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그 문을 통과한 사람을 말씀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그 길에서 우리는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지금이라도 당장 성경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 다음 장부터 안내하는 흐름을 따라 성경의 문을 두드리기를 바란다.
성경을 여는 문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는 삶의 비밀! 제자로 사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적 지침서 종교개혁을 통해 성경이 성도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지금은 또 하나의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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